기본 1327

기분 좋은 날

기대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난이 풍년이다. 한 대가 지나가고 아쉽지만 그래도 어디야 하면서 잊혀질 무렵 그 화분에서 세 대가 올랐고 그 옆 십 년도 더 된 화분에서 두 대가 올랐다. 오늘 화분 두 개에서 난 향기가 그윽하다. 베란다로 눈이 가고 발이 따라간다. 코는 길어진다. 기준 좋은 날이다. 이런 맛에 난을 키우는가 보다. 잘 키우지 못했는데 좋은 향을 내게 준 난에게 미안하다. 난 향은 영혼을 맑게 한다. 마음도 평안하게 한다. 은근하게 섹시하다. 오늘은 기분이 매우 좋은 날이다.

기본 2021.08.20

가을인가?

칠석 전 날 비가 내렸다. 견우와 직녀가 미리 만난 것일까. 오늘 핸드폰 기상예보가 최고 기온이 29도 라고 표시되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길목에 앉아서 피시를 보는데 팔과 다리가 서늘하다. 여기 저기 열었던 문들을 몇 개 닫았다. 가을인가? 백중도 안 지났는데. 오빠 생일을 시작해서 할아버지 제사 시숙 생일 아버지 제사 여동생 생일 엄마 생일 내 생일 추석 동서 제사 등이 네 달 동안 이어진다. 그러고 나면 가을과 단풍이 시작된다. 한 게 뭐 있다고 벌써 찬바람인가.

기본 2021.08.18

먼 일이 아니네.

전화를 받으니 동기가 급하게 말한다. 딸이 코로나 양성인데 입원 가능한 병원이 멀다고 기다려 하나 하고. 크지 않지만 밤에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이니까 믿고 빨리 입원시키라고 했다. 대형 병원으로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빠른 치료가 우선이라고 하면서. 밤이 돼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본인은 밀접 접촉자라서 자가격리 대상이고 남편은 백신 1차 2차 접종 했는데도 양성으로 나왔으나 무증상이므로 병원이 아닌 치료센터로 가고 딸은 내 말을 듣고 입원했다 고 한다. 혹시 딸이 먹고 싶다고 하면 좀 사다 주라고 부탁한다. 집에서 열흘은 꼼짝도 못한다고 신세 좀 지자고 한다. 공교롭게도 남편도 딸도 내가 사는 근처로 온다. 뉴스에서만 존재한다고 여겼는데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코로나 감염은 코에서 이루어진다 ..

기본 2021.08.17

동생네 집

연필화를 그리기 위한 도안이 복사본이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다른 수강생에게서 빌렸다. 스캔을 부탁하기 위해 동생네 집에 갔다. 동생이 근래 정리하지 못했다고 집에 들이기 꺼려 했으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들어오라 한다. 넓지 않은 집에 세간살이가 많이 늘었다. 동생의 취미 생활인 커피 도구도 별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 장비도 화원을 하는 동생댁이 살리려 가져온 화분들도 그것들을 정리하지 못한 시간 부족과 겹쳐서. 동생은 내가 시누이 노룻을 할까봐 돌려 말을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난 남의 집 정리 정돈에 관심 없다. 모든 식구가 경제 활동 하는데 집이 깔끔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여섯 시만 되면 집에 도착하는 직업도 아닌데 멀지 않은 곳에 친정 아버지가 혼자 계신다면 더. 여자에게 시자가 붙는 ..

기본 2021.08.15

난을 좋아하지만 키우기 보다 보내기를 잘 한다. 화원에서 난을 사 집에서 심은 난이 죽네 사네 하면서도 십여 년을 견뎠다. 꽃을 보기에 포기했는데 꽃대가 올라왔다. 연초 겨울에 피는 난이 꽃대만 보고 꽃을 보지 못해 아쉬웠었다. 여름 난은 피기는 했지만 한 대만 보여주고 며칠 전 향기를 멈췄다. 아쉬움에 자주 보는 걸 느꼈을까 두 대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오늘 밤 난 꽃대 세 대를 봤다. 기분 좋은 밤이다. 특히 십여 년만에 마주하니 더 기쁘다. 난은 더위가 반가운 건가?

기본 2021.08.13

강냉이

서울에 와서 물건의 이름이 달라 당황스럽고 난처한 경우가 허다했다. 오래 돼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지만 지금도 혼란스러워 통역을 하는 물건이 있다. 강냉이다. 뜬금없이 "강냉이"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뻥튀기 강냉이를 떠올릴 것이다. 내게 뻥튀기 강냉이는 강냉이 튀밥이다. 곡물로 뻥튀기 기계에서 부풀려 나오는 것들은 모두 튀밥이다. 쌀튀밥, 보리튀밥, 콩튀밥, 강냉이 튀밥 등등 들어 간 곡물에 튀밥을 붙인. 강냉이가 사투리어서 옥수수 라고 하라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튀밥이 왜 강냉이가 되었는지 알 수없다. 올 여름 친구가 아는 사람에게서 강냉이 여든 개를 사서 내내 먹었다. 친구가 준 강냉이를 먹으니 어릴 때 먹었던 맛과 흡사해서다. 밥 대신 내내 잘 먹었다. 문제는 중독되어 강냉이만 찾는다. 학교 급..

기본 2021.08.10

생각나지 않는 궤적

시간 죽이기 용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절대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식이 없으면 경험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지식도 경험도 없으며 추억마저 없으니 펜을 쥔다면 첫 자에서 떨다가 내려 놓을 거다. 왜 학교 다닐 때도 직장에 다닐 때도 아들을 키울 때도 결혼 생활도 친구들과도 생각나는 것들이 없을까. 줄거리는 없고 파편만 한두 개 떠오르다 사라진다. 치매도 아니면서 고스톱을 할 줄 모르면서 그 판을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잘 지켜 남을 힘들게 하며 산 게 아닐까.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본 2021.08.09

손이 심심하다.

눈으로 화면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의자에 앉아 있고 손이 할 일이 없다. 식구가 적으니 살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뭔가 찾아서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럼에도 손의 심심함은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다. 밤바람이 시원하다. 오늘은 온도계와 상관없이 바람이 좋다. 며칠 전 비가 내리더니 기온 숫자도 변하고 밤의 열기도 수그러 들었다. 가을이 염탐 온 것일까? 손이 심심해 블러그에 왔다. 커서와 화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본 2021.08.06

입 닫기

오늘 사진강의에서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늘 함께 한 사람이 접수를 놓쳐 자신이 포기하고 그 사람이 강의를 듣게 했다는 것이다. 기분 좋게 수업을 들었는데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강화도 출사 수업 갈 때 차에서 참지 못하고 불끈했다가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있었다. 참을 걸. 내내 후회하면서 강의가 재개되기를 기다렸다. 지난 강의 시간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은 싸 했다. 나름 사정이 있을 거라 여기면서도 그 일이 뒤를 잡는다. 어찌해야 하나. 사진강의에서는 되도록이면 입을 닫고 조용히 듣기만 해야 할 거 같다. 발끈하는 성질도 죽이고.

기본 202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