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돌아온 장갑

사춘기 2004. 1. 19. 20:26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눈부신 고립,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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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이 크다.

손이 크다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글자  그대로 손이 크다는 뜻이다.

 

손이 크므로 장갑을 사는 것도 큰 일이다.

겨울이면 장갑을 파는 곳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내 손에 맞는 장갑이 있는지 끼어보고 사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끼고 있는 장갑이 6년째다.

 

내가 취직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중일 때에

아주 유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름하여 큰 손 장영자 사건이다.

내 손을 보면 크기에 놀라고 장영자를 이야기 한다.

 

직장에서도 내 손은 크기로 인하여 우스개 소재가 되었다.

처녀의 손이 그리 커서 어찌 시집을 가누

누군지 모르겠지만 반지할 때 돈깨나 나가겠구먼

신문에 손만 나오면 00가 나오는 줄 알면 되겠네

이거이 여자 장갑이여 남자 장갑이여

 

오랜 세월동안 손과 함께 들었던 말들을 이제는 거의 잊었다.

잊었다기보다는 무감감해졌다고 해야할 것이다.

새까만 후배들이 내 손을 소재로 농을 해도 그냥 웃고 만다.

그래도 이 손으로 가족과 함께 먹고 사는데...

 

오뉴월 개 혓바닥처럼 가죽이 늘어져

보기흉할대로 흉해진 장갑이지만

차라리 잃어버리면 새 장갑을 끼고 다니지

하면서 흘려버리기를 원했던 장갑을 드디어 그저께 잃어버렸다.

 

장소가 잃었다고 하기에는 묘한 곳이기는 하지만

찾지 못햇으니 잃어버린 것은 분명했다.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 입고 분명히 쥐고 나온 장갑이

한 층 아래인 사무실에서 보이지 않아 바로 올라갔는데 그새 없어진 것이다.

아쉽기는 했지만 새 장갑의 유혹에 한편으로는 잘됐다는 마음도 들었다.

(2년전 선물받은 장갑이 있는데 구하기 힘드니까 아끼느라 끼지 않고 있었다.)

 

퇴근하려고 탈의실에 갔더니 장갑이 소파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청소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복도에 흘린 장갑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여자장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그렇다고 남자 장갑도 아니니 낡아 버렸으려니 하고 버렸다고 한단다.

 

다시 찾은 장갑이 반가움보다 웬지 씁쓸하다.

내 마음이 이리 갈팡질팡 하는 것을 보니

그 장갑과 인연도 다 끝나가는 것 같다.

어쩌면 더 질긴 인연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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