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善者不來 來者不善

사춘기 2008. 7. 13. 14:33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집에서 굴러다녔으니 다녀왔다는 말은 틀린 표현일까?

 

아들이 징병검사를 받았고

나는 편두통 정기검진을 받았다.

남은 시간은 페르시아 황금전을 보고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도 구경했다.

폭염이 서울을 덮던 오후들에

아직도 팔뚝이 벌겋다.

 

사람이 살다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있을 법한 일들을 겪기는 하는 모양이다.

내가 그랬다.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분수대 비치파라솔에서 기다리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단어에 힐끗 쳐다보니 퇴직한 과장과 캡틴이라 인사하려는데

다음에 들려오는 말이 나에 대한 말들이어서 그냥 앉아 있었다.

그들은 2년전 내가 겪은 악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도 궁금해 했던 내막을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퇴직한 지 반 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내가 미운 것일까.

미웠던 것일까.

나를 잘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뭐가 그리 미웠는지 감정을 실어 목소리가 떨렸다.

퇴직하고도 내가 미웠던 것일까.

나를 가까이서 겪지 않고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들은 말을 가지고

 

2년 전 일을 겪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삶의 기준이 뿌리채 흔들렸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 잘못도 있다는 것까지 인정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못했을까.

 

단순하고 무지한 내가 그것을 독학으로 깨닫기는 힘들었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우연히 접한 로맨스소설이었다.

유치하고 저급하다는 로맨스소설에서 나는 나의 잘못을 발견했다.

근본적인 잘못을 발견했다.

 

둔하고 단순한 나는 어려서부터 먹이감이었다.

일등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앞서간 성적과

남보다는 낫다는 평을 듣는 외모와 큰 키 등은

여린 내가 시기와 질시의 먹이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때리는 사람들

어려서는 맞았지만 자라서면서 방어책을 나도 모르게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게 차가운 말씨와 냉막한 표정이었다.

 

호불호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조금만 친해도 애인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세상을 향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가시는

나를 보호한 게 아니고 거꾸로 나를 쑤셔 상처를 남긴 셈이다.

 

직장에서 나는 순하고 배경도 없어 쉽게 잡힐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잡혀지지 않는 직원이었다.

남편도 한 번도 잡혀지지 않는 사람이라며 한 번쯤 잡아보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그런 점도 남들에게는 내가 싫어지는 한 요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상사를 모시면서도

상사를 모시는 게 아니라

내 입맛에 맛게 상사를 모셨던 같다.

내가 상사의 입맛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상사의 입맛에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만 맞는 해석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상사의 체면도 살리고 내 실리도 찾는 그런 직원이 아니고

인정하기 싫어도 그런 면이 강했다.

 

또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습성도 남이 나를 어렵게 한 것 같다.

아주 쉬운 일도

아무리 바빠도 남에게 절대로 부탁하지 않는 습성

그 역시 좋은 습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도가 아니면 선택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남이 힘들어 했던 것 같다.

남들이 쉽게 다가오기 힘든 요소들을 나는 다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은 내게 오지 않고

내게 오는 사람은 좋은 일로 오지 않는 다는 말

 

맑은 물은 큰 물이 될 수 없고

큰 물은 맑은 물이 될 수 없다 는 말

 

둘 다 무협지에서 읽은 말이지만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세상을 향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고슴도치는 가시를 세우지만

피에로는 웃음을 보낸다.

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어느 책에서처럼 실컷 울고나서

어느 책에서처럼 허리를 잡고 웃을까.

그런데 난 지금 현실에서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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