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설 전날인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겁(?)을 줬다.
눈썹이 하애질까봐 잠을 안자고 버티다가 잠을 깨보면 설날 아침 차례상이 차려지고 있기도 했다.
놀라는 어른들도 안계시는데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동생의 큰딸이 질녀가 떡국을 먹기 위해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늦잠을 잤고 감기가 걸려 가지 못하겠다고 전화와서 그러라고 하고는
만두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미리 사 놓은 재료들을 꺼내 떡만두국을 끓였다.
고명이라고는 김을 부숴 넣는 것 뿐이었는데도 정육점에서 산 사골국물의 맛이 훌륭했다.
평소보다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각자 화면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질녀가 집 앞이라고 문을 열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내가 착각해서 설날 밤에 아들이 내려간다고 했더니 아들을 보기 위해 온 것 같다.
명절에만 만나는 사이인데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모두 형제가 고픈 것 같아 보였다.
찻상에 내 놓을 건 마트에서 산 차이와 사과와 군것질용 약과뿐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대화를 시작했다.
적당한 시간을 보낸 질녀가 공부해야 한다고 일어난다.
밖에 어둠이 보이기 사작한 시간이다.
약과가 맛있었는지 남은 봉지를 가방에 챙긴다.
두부 만들과 생긴 비지와 세뱃돈과 퇴직 시 만든 회고록을 남동생인 아빠에게 전하라고 건넸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가 배웅하는 게 예의라고 아들 등을 떠밀었다.
할머니인 엄마가 돌아가시고 갈 곳을 잃은 질녀의 명절이 안타까웠다.
식탁 위에 카스테라가 누구가 다녀갔다고 말하며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올 설도 질녀로 인해 적막강산인 집이 깨졌다.
저녁은 비지를 끓이고 떡국을 끓이기 위해 산 한우양지를 구웠다.
두부 하나로 갑자기 풍성해진 설 날 식탁이다.
무성영화 같은
단편소설 속 같은 장면의 설날이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