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남편의 주정

사춘기 2004. 3. 12. 13:45
 사랑의 구개

기억 없이도 그리움은 찾아오고

기억 없이도 목이 마르다.

풀들은 흙 묻은 얼굴을 털고

뭐라고 뭐라고 나무들은

햇빛 속에 잎을 토해내는데,

다시 봄이란다.


(그대여, 그토록 멀리 있으니

그 거리만큼의 바람으로

뺨을 식히며 토로하노라)


참 오랜만에 볼펜을 쥐고 눈을 감았다.

그만해도 피가 따뜻했다, 처음엔.

나의 척추, 나의 묵주, 나의,


나는 그 뾰족한 끝으로

차라리 심장을 후벼 파고

뻗어버리고 싶었다,

햇볕 속에.


아, 다시 봄이라는데

갈라진 마음은 언청이라서

휘파람을 불 수 없다.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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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술을 자주 마신다.

술을 좋아하기보다는 술자리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그러다가 알코올중독자 된다고

잔소리하는 나를 코웃음 치며 자주 마신다.


남편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은

일년에 한 두 번 볼까 말까 하니까 마시는 양이 많은 건 아니다.

어제 남편이 11시도 안되는 시간에 들어오면서도 비틀거린다.

몸에서는 소주와 맥주 짬뽕냄새가 난다.


드라마를 보면서 실내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안기기도 하고 안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아들이 보다 못해 고개를 돌리고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 좋다 내 집 같고 사는 것 같구나 내 마누라


남편이 중얼거리며 토할 것 같다고 화장실로 간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씻지도 않고 누워버린 거실에는 짬뽕냄새가 진동한다.

냄새에 민감한 편두통이 시작하려고 한다.


안하던 행동과 말이 신경이 쓰여 누운 남편의 옆에 앉았더니

못난 남편 만나 고생하지 한다.

내가 놀라 쳐다보니 자기가 한 말이 어색한지 멋쩍게 웃는다.

내 집 같다는 말과 못난 남편 만나서 라는 말이

목의 가시처럼 내내 거북하다,


못난 것 다 알고 결혼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못난 것 알고  선택했으니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지.

남편의 지론이다.

나 역시 내 선택을 남편의 책임으로 미루는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기에 남편의 말은 상어가시마냥 숨쉴 때마다 힘들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고생도 행복도 내 몫이다.

누구에게 하소연 할 필요도 없으나 그래도 투덜거리고 싶었다.

남편은 평소에 나처럼 편한 여자가 대한민국에 어디 있느냐며 코웃음 쳤다.


아들은 친정엄마가 봐줘

시댁과 따로 사니 시집살이를 하나 누가 시집살이를 시키나

손 내미는 사람 없어

내가 돈을 써 노름을 해

직장에서도 편한 일만 해

살림이 커서 힘들기를 해


남편이 내가 힘들다고 하면 호강에 받힌 소리 한다고 한다.

못난 남편 만나서 라는 말은 감히 생각하지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아침을 준비하면서도 생각하다가 반찬그릇을 떨어뜨려 가루를 만들었다.

남편의 주정은 꿈으로 이어져 내내 악몽으로 시달렸다.

기대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으며 살았기에

가끔은 우리가 부부일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지만

갑자기 변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받아들이기 만큼이나 힘들다.


드라마 장면을 보면서 저런 연애는 한번쯤 하고 결혼했어야 하는데

에이 지금 저런다고 결혼 전에 느끼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나.

주정 사이사이로 지껄이는 내 말에

옳아! 옳아! 참 억울하지 불쌍한 내 마누라 히히


남편은 한참을 떠들고 과장된 몸짓으로 활개를 치다가 잠이 들었다.

잠든 후에도 남편은 주정을 부릴 때처럼 빙글빙글 웃는다.

그 꿈속에 누가 있을까.

 

가시는 지금도 침을 삼킬 때면 따끔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