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아버지

사춘기 2004. 2. 28. 10:56
 술보다 독한 눈물


눈물처럼 뚝뚝 낙엽 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 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 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 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 이였다는 것을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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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설에 성묘를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고 하신다.

한식이 얼마 남지 않아 밀릴 텐데

걱정이 많이 묻어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전화선 너머로 들으면서

열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남자다.

키도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모두 대한민국 전형적인 남자다.

또한 식민지 시대에 쫄딱 망해버린 가문을 일으켜야하는 사명도 가졌다.

아버지가 남보다 뛰어난 것은 두주불사한 술과

하루 서너 갑을 너끈하게 재로 날리는 담배다.

덕분에 엄마가 기관지기능 저하로 심한 고생(치료를 할 수 없는)을 하고 계신다.


엄마는 키도 크고(170cm) 빼어난 미인이고 명문 가문인 친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감각과 눈썰미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남자였다면 능력이 출중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셨을 거다.

주변 사람 모두가 인정한 사실이다.

실제로도 경제적인 손해는 아버지가 다 만드셨고

엄마는 그 뒷수습만 하시다가 평생을 바치셨다.

그 와중에 경제적인 혜택에서 소외된 것은 우리 형제였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샌님이다가도 알코올 성분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 헐크로 변하셨다.

문제는 알코올 성분이 자주 아버지 몸 안에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 시대로 기준했을 때 아버지는 결코 뒤처진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 식구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남들과 함께 했고

그 점이 엄마와 잦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우리는 아버지를 피했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계셨을까

이 화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내내 우리 형제들을 괴롭혔다.

엄마는 평생을 아버지 뒤치다꺼리만 하시다가 말년에는 위암 수발까지 하셨다.


엄마가 아버지가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을 하신 것은

서울로 올라 온 다음이니 아버지가 회갑이 다 된 연세였다.

아버지가 백수는 아니었으나 번 돈을 엄마에게 주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때늦게 아버지 월급을 받아들고는

나도 이제는 살림만 하는 주부구나 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너무 힘들게 사는 엄마에게 내가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왜 아버지하고 살아 헤어지지 않고

나는 능력이 뛰어난 엄마가 아버지와 엄마의 시집 뒤치다꺼리만 하고 사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우리 형제들하고 살면 잘 살 텐데 하는 생각에서 물었던 것이다.

어린 내가 그런 질문을 엄마에게 할 정도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고 위치였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형제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과부가 되었다며 한숨을 쉬셨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돌아가셨지만 환갑진갑 다 넘기셨으니

엄마가 과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치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음을 자책 비슷하게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평생을 아버지와 엄마의 시집을 원망하며 사셨던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아버지의 존재를 느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 친정에 갔을 때였다.

집안에 휑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하여 무엇인지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와 깨달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여야 하는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셨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돌아가신 다음에 알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아버지와의 거리는 돌아가신 다음에도 좁혀지지 않았다.

아버지 제삿날 모여도 우리는 아버지를 추억할 그 무엇이 없었다.

아픈 기억을 새언니나 동생 댁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고 우리는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무엇이 아버지와 우리들을 벌려놓았을까.

평생을 증오하며 사셨던 엄마가 아버지의 산소를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자식보다 배우자가 훨씬 낫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 이런 생각을 남이 안다면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후레자식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건사할 능력을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기고 아버지 형제와 친구들과만 사신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로 인해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없이 주저앉아야만 했던 좌절감과

아직도 겪고 있는 경제적인 부담으로 나는 아버지를 지금도 원망한다.

아버지가 아버지 형제와 친구보다는 자식인 우리와 함께 하셨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사회적인 위치로 오를 수 있었고

좀 더 나은 조건을 가진 배우자를 고를 수 있었다.


나은 조건의 배우자라고 해서 더 행복하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힘들 때마다

고모나 작은아버지 또는 우리 돈을 갚지 않은 사람들과 친척들이

우리보다 잘 살고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속은 특히 내 속은 뒤집어지고 만다.

받지 못한 돈으로 인해 우리는 집안과 내왕을 끊다시피 살고 있다.

비록 아버지 잘못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갚지 않은 사람보다

준 아버지가 더 원망스럽다.

그 돈만 있었다면 강남에 집을 사도 여러 채 샀을 텐데 하는 생각에서

강남을 지날 때마다 강남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 죽을 때까지 풀기 힘든 화두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