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기미

사춘기 2005. 10. 28. 10:33
나는 피부가 좋은 편에 속한다.

어떤 비누로 세수를 해도 어떤 화장품을 사용해도 피부에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는다.

햇볕에 오랜 시간 있어도 잘 타지 않는다.

혹여 좀 타더라도 금세 회복된다.

유난히 하얀 피부는 아니었지만 뽀얀 색깔은 남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았다.


그랬던 피부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까맣게 변했다.

게으른 성격과 타고난 피부로 맨송맨송한 얼굴로 용감하게 출퇴근하던 내가

화장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스물일곱 가을인가 겨울인가 무렵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까맣게 변한 딸의 얼굴이 걱정되셨는지

기미는 속이 좋지 않으면 생기는 거라며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다.

내과에서는 모두 정상이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이유 없이 찾아온 기미는 내 얼굴과 나를 바꾼 채 10년을 넘게 동거했다.


어떠한 유혹(?)에도 끄떡없던 기미가 조금이라도 엷어진 것은

허리가 아파 먹게 된 한약에 녹용을 가미하여 먹게 되면서다.

한의사는 기미가 피부 탓이 아니라 몸이 허약하거나 하는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조금 엷어진 기미는 그대로 굳건하게 자리 잡아 내 얼굴을 여전히 대표했다.


기미가 또 한번 색깔이 변했다.

재작년 자궁근종으로 수술을 했는데 회복하고 나니 기미의 색깔이 엷어졌다.

여자는 자궁이 실하지 않으면 기미가 생긴다는 속설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올 가을 드디어 내 얼굴이 원래 내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얼굴을 점령군으로 존재할 것만 같던 기미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원인을 잘 모르겠다.

지방간에 좋다고 해서 먹기 시작한 녹즙과

몸이 자꾸 부어 그냥 좋다고 하는 감언이설에 클로렐라를 거의 같은 시기에 먹었다.


먹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달

남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내 얼굴 봐봐 기미가 많이 없어졌지 않아?

정말 뭘 먹었어?

상대방도 내 호들갑에 박자를 맞춰준다.

어쩌고저쩌고


그동안 내 피부가 참 좋았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

난 사람들이 날 몰라주고 그런다고 억울해했다.

드디어 나의 본 모습을 보고 어떤 판단을 내릴까

얼굴이 그 사람의 전부인양 성형이 유행하는 세상

피부는 그 사람의 전부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미는 나를 내가 아니게 만들었다고 난 마구 강조했다.

하지만 기미도 또 다른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광대뼈 부근에서 발버둥치는 기미

내 그림자일까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