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한 심뽀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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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면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업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담당보다 먼저 와서 서류를 내는 사람이다.
아마 집이 근처에 있어서 출근하면서 들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색할 정도로 또는 비굴해 보인다고 할 정도로
허리를 굽실거린다.
난 그 모습이 싫다.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나에게 굽실거려야 하는지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모습을 보면서 변한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의 굽실거림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기분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 나쁜 버릇이 하나 있다.
사람을 처음 대할 때 웃는 사람을 경계하고 싫어하는 버릇이다.
초면인 사람에게 환하게 웃으며 친절한 사람을
나는 드러내 놓고 경계하고 싫은 내색을 보인다.
내 딴에는 조심한다고 해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난다.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에서 도와드린 적이 있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외상 하는 사람은 항상 웃으며 가게에 들어섰고
그 외상값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비굴하게 웃어야 했다.
난 어른들의 그러함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사람들의 이중적인 면을 너무 빨리 보았다.
직장생활이나 사회활동에서 나의 그런 성격은
좋은 쪽으로 보다는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항상 경계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도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항상 몸을 사렸다.
아침이면 나 보다 먼저 사무실에 출근하는 그 남자로 인해
내가 변했고 나도 어느새 아부성 발언과 굽실거림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누가 나를 칭찬하면 왜 그럴까 부터 생각하는 버릇이
의심보다 먼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의를 제기하면 그 이의를 받아들여 열심히 생각하던 버릇이
자신을 설명하면 말대꾸한다는 생각부터 드니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잘 모르겠다.
뇌세포나 신경줄기가 노화한 것인지 병이 생긴 것인지
이런 진단은 어디에서 받아야 할지.
애꿎게 아침마다 굽실거려 내 신경을 무디게 만든
그 남자만 원망하지만 어디 그 사람 잘못일까.
그래서 습관이 무서운 것이고
가랑비에 옷 젖는 게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