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가요무대 유감

사춘기 2004. 11. 18. 09:55
사진도 늙는다


                                          -정일근-


잠시 왔다간 세상 사진 한 장 남기신 아버지

20대 후반 공군 시절 닫힌 격납고 배경으로

푸른 군복,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아버지

어머니 몰래 한 20여 년 그 사진 숨겨두고 아버지를 추억한다

신기하다, 닮고 싶지 않았던 사진 속의 아버지를 내가 닮아가고

사진 속의 아버지는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하루하루 늙어간다

늙으신 어머니 그 곁에 나란히 서로 어울릴 듯

배경 풍경들 욕심 없이 늙어간다

신비한 시간의 힘이여

사진 속에서도 시간은 쉬엄쉬엄 흘러가

사진 밖의 세상과 사람과 함께 늙어간다

사진 속에 담긴 추억도 슬픔도 쭈글쭈글 김빠져간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옛 모습으로 남아 기다리지 않는다

잊고 살아온 사진을 찾아 펼쳐 보라

사진도 늙는다! 우리와 함께


-시집 ‘가족’(문학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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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밤 10시대에 드라마를 보지 않으려면

교육방송이나 채널 9로 고정시키면 된다.

남편이 있는 날은 거의 가요무대를 본다.


가요무대는 전국노래자랑과 더불어

노인들이 보는 대표적인 프로로 알고 있다.

그 프로에 내가 어려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나오고

우상이었던 가수들이 나와

트로트를 가미하여 노래를 부른다.


한마디로 서글프다.

내가 어느새 라는 감정이 서글프고

우상들이 세속에 물든 것만 같아 서글프다.

가요무대가 세속에 찌든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세대에 활약했던 가수들은

출연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노래는 반갑다.


어느새 내가 가요무대 세대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남편의 독백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느끼기 싫어도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이

늙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현실이 싫다.

가요무대는 일주일에 한번씩

내가 늙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래서 싫어하면서도 가수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겨워한다.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고 사고인가.


늙는다는 것이 모순이어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 같다.

자신들이 늙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대우는 제대로 받으려 하는 모순된 사고와 역정

뻔히 알면서도 서운하고 짜증나는 그런 감정들

굳이 가요무대에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일상에서 문득문득 느끼는 모순된 감정의 덩어리들이

나를 괴팍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멀어지게 한다.


가을이어서 더 덧없어 하고 아쉬워하면서

몸부림치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라지만

그래도 자꾸 시작하고픈 욕구가 솟는다.

무엇을 시작할까

가요무대에서 새로 시작하는 우상들을 생각하자.